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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과학 /탐구

스티브잡스 그는 누구인가? Steven Paul Jobs




내가 스티브잡스를 처음 알게건 10대 중반쯤 컴퓨터를 배워가며 재미를 막 붙이는 과정에 컴퓨터의 역사에 대해 궁금할때쯤 IBM, HP를 차례로 알고 그 당시는 애플보다는 '맥킨토시'라는 명을 더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맥킨토시' 사용은 디자이너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저 상식정도로 알고 있을 요량으로 도서관에서 찾아봤었다. '맥킨토시', 맥은 '애플'이란 회사에서 만들었고 그중에 '스티브잡스'가있는데 이 사람을 프로그래머도 하드웨어적인 기술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앞선 기획적인 일을 하는 사람인데 회사에서 1985년 쫒겨났다란것을 읽게 되었다. 특히 그의 사진이 핸섬했기에 더 기억에 남았고 그 당시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스티브잡스가 회사에 쫒겨났다는게 좀 불쌍한 사람이구나 정도로만 여겨졌다.

이후에도 내가 10대중후반부터~20대중반까지 컴퓨터 관련 공부나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공부할때면 반복적으로 애
플, 맥킨토시(맥), 스티브잡스에 대해 듣게되었다.

이쯤 생각하니 술술 떠오르는것!! 컴퓨터 이론을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접하는 '세계최초의 개인용 컴퓨터?'하면 바로 나와야 할 말 '1974 년 미국 altair 8800, 1975년 IBM의 IBM 5100, 1976년 스티브잡스와 스티브워즈니악의 Apple 컴퓨터는 대중화에 기여함'이 말이 머리속에서 왔다갔다한다.

다시 돌아가서, 1985년 애플에서 쫒겨난 후 넥스트사 설립했는데 그 회사를 1997년 애플에서 인수해 다시 애플에서 일하게 되고 그해 애플의 임시CEO가 되면서 다시 애플을 끌어가게 된것까지 알게되면서 더욱더 그에게는 시대를 앞선 생각을 갖고 있는 인재란 생각을 하게되었다.

2011년 8월 24일 언론을 통해 애플은 성명을 통해 스티브 잡스가 이사회 의장직은 유지하지만  CEO를 사임하고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이 새로운 CEO를 맡는다고는 소식을 듣고 그의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구나란 생각에 안타까워지면서 그가 여태껏 해왔던 일을 하나식 나열해본다.



그의 프리젠테이션 능력을 정말 대단한것 같다. 설득력있고 믿음감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먼저 빼놓을 수 없느 그의 프리젠테이션 동영상을 유투브에서 옮겨와봤다.





1983년 스티브잡스 맥킨토시 시연
 

 






출생 1955년 2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망 2011년 10월 5일 (2011년 10월 6일 추가내용)
국적  미국
학력 리드 대학교 중퇴
직업 애플 대표이사 회장 (2011년 8월 24일 사임)
     월트 디즈니 이사
 
배우자 로렌 파월(Laurene Powell)
자녀 4명
부모 폴 잡스 클라라 잡스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생 동거 커플인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남.

1955년 3월 2일
그의 생모는 그를 낳았을 때 미혼이었던 대학원생이었다. 그녀는 그를 임신했을 때 자기 혼자 그를 기를 수 없다고 판단해 그를 낳으면 입양을 시키고자 했는데,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양부모에게 그를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모 뱃속에 있던 그를 입양하고자 계획되어 있던 변호사 직업을 가졌던 양부모는 아들이 아닌 딸을 원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남자 아이로 태어나자 입양을 포기한다. 그러자 대기자 명단에 있던 그의 현재 양부모에게 연락이 갔지만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생모는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양부모에게 그를 보내는 대신 반드시 나중에 그를 대학에 보낸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받는다.

태어난 지 1주일 후에, 캘리포니아 주 산타 클라라에 사는 폴/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
잡스를 입양한 부부는 그에게 스티브 폴 잡스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를 낳은 부모는 결국에는 이혼하고 말았지만, 결혼해서 소설가이기도 한 잡스의 여동생 모나 심슨을 낳았는데,
둘은 어른이 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그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를 유일한 부모로 여겼다.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자주 빼 먹어 담임 선생님이 돈과 사탕으로 구슬리는 것으로 겨우 학교생활을 하던 그는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얻는 순간 인생의 전환점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이 덕분에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동안 그는 팔로 알토의 휴렛 패커드사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으며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휴렛 패커드사에서 여름 동안 임시 채용되기도 했다.


1972년 고등학교에서 졸업한 잡스는 그의 양부모가 친모와의 약속대로 그를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리드 대학교 철학과에 보냈으나 학비가 너무나 비싸 그동안 모았던 거의 전 재산을 그의 학비로 쓰게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빈 코카콜라 병을 팔며 생계를 이었으며 끝내 대학은 다니다 경제적 사정으로 1학기만 마치고 중퇴하였다.
후에 잡스는 부모님들이 비싼 학비를 내는 데 대해 부담스러웠다고 학교를 도중에 그만둔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중퇴하기는 했어도 그 후 18개월 동안 학교에 머물며 타이포그래피등 여러 수업을 들었으며 타이포그라피는 이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윈도우는 글씨체에 있어서 매킨토시를 그대로 베꼈기 때문에 그가 그때 글자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오늘날 컴퓨터를 쓰는 우리들은 지금처럼 다양한 글씨체를 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청강생이 정규학위를 포기하고 재미삼아 들은 수업에서 배운 지식이 나중에 인류의 미래를 바꾼 것이다.

1974년 가을, 잡스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왔고 일거리를 찾던 중 애터리라는 회사의 비디오 게임 프로그래머가 됩니다. 이때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s)’이라는 아마추어 컴퓨터 모임에 참가하기도 하고 한 회원이 가지고 온 최신형 앨테어 개인용 컴퓨터를 보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며 사업을 구상합니다. 거기서 친구인 빌 페르난데즈를 통해 빌 페르난데즈의 친구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을 알게되었다. 스티브 위즈니악을 끌어 들여 부모님의 창고에서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초기 컴퓨터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그는 워즈니악에게 아타리(Atari)로부터 받은 게임 관련 프로젝트(Breakout 이라는 게임)를 소개해주게 되고 워즈니악은 불과 4일만에 게임을 프로그램 해내었다. 그러나 잡스는 아타리로부터 댓가로 700 달러를 받았다며 워즈니악에게는 350달러만 주고만다. 그러나 실제로 잡스는 아타리로부터 5000 달러를 받았던 걸로 알려졌다.


위사진은 처음 차고에서 개발을한 모습이라는데 확실하게 실물사진인지 재연을 해놓은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런모습이었으거 같다. 모습으로 보아서는 스티브워즈같다.


스티브워즈로 추정되며, 작업하는 모습 재연으로 추정된다.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동업으로 애플 컴퓨터를 설립.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을 공개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하였다.
GUI와 마우스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다보고 애플 리사와 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하였다.


 

스티브잡스와 스티브워즈니악 블루박스 1975년

 



그의 딸 Lisa Brennan Jobs 함께


잡스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온 여자 친구 크리스 앤 브레넌이 1978년 5월17일 오리건 주 농장에서 잡스의 딸을 낳게 되었고 이때 잡스는 찾아가 리사 니콜이라는 이름을 함께 짓고 양육비도 보내주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그래서 양육비도 지원하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10년후 2년간 부양비를 지급했던 행정기관이 제기한 친자소송으로 잡스는 비로서 딸 리사를 인정하게 된다. 그 시절의 잡스는 비난받을 어리석을 행동을 했다.

딸에대한 미안함과 애틋한 마음이었을까 그는 아무도 꿈꾸지 못할 컴퓨터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고 그 컴퓨터의 이름을 '리사(Lisa)'로 지었다.



1980년 주식 공개
1984년 애플 리사, 비싸다는 이류로 맥킨토시 판매 실패
198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남
1985년 넥스트사 설립
1986년 컴퓨터 그래픽 회사 인수해 픽사로 명칭 변경 이후 <토이 스토리>히트, 현재는 디즈니사로 합병됨.
1997년 넥스트사 애플에 인수. 7월 최고경영자로 복귀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악화
2004년에 췌장암 수술
2009년 6월 간 이식 수술,호르몬 치료

뒤늦게 인정한 그의 딸 리사가 10대였을때부터 같이 잘 살았고 하버드 대학도 보내주었다. 몇해전 '보그'지에쓴 리사의 에세이에 실린 글을 옮겨본다.

"어머니는 혼자 절 키우셨죠.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우리 모녀는 여러 곳을 많이 옮겨 다녀야 했었죠. 가지고 싶은 것은 살 수는 없었어요. 단지 많은 것을 빌려야 했죠. 하지만 그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고 행복했던 때였죠.


나중에 알게 된 아버지는 정말 유명한 사람이었고 부유했었어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전 매력적인 세계를 보았죠. 하지만 난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었어요. 내가 한쪽에 있을 때 난 다른 한쪽이 항상 그리워했으니까요."

[리사 브레넌 잡스]


2011년 1월 병가, 3월 아이패드2를 발표, 8월 24일 최고경영자 사임

2011년 10월 5일 사망  (2011년 10월 6일 추가)

 

스티브잡스와 스티브워즈니악 애플컴퓨터 1976년


1976년 애플1



1977년 애플2




스티브잡스 애플2



 

스티브잡스와 스티브워즈니악






 

1983년 리사애플






 

 

 








1984년 매킨토시

 

 








 

1998년 아이맥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출시, 2010년 아이패드 출시

현재까지도 아이폰, 아이패드 업그레이드 버젼이 나올때마다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건강상의 문제로 10년이 자나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사진이다.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해석 ---

 
스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물론이죠"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 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왜냐구요?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췌장이란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 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더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Stay Hungry. Stay Foolish.")"

감사합니다.(Thank you all very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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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6일 추가 내용]

애플은 2011년 10월 5일( 미국 현지시간) 성명서를 통해 스티브 잡스의 사망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




애플 창업자이자 전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것으로 5일(현지시간) 공식 발표되자 네티즌과 트위터리안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이번에는 오보가 아니라 사실이지만, 많은 이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아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면서도 IT의 혁신을 이끌며 세상을 놀랍게 변화시킨 그의 일생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추모의 글을 잇따라 올리고 있다.

2004년 처음으로 건강상 문제를 공개한 이후 수년간 췌장암 투병을 해왔고, 최근 CEO에서 사임한 것도 건강 악화가 원인으로 지목되는 등 그의 사망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징조가 많았지만, 실제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세계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잡스는 PC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새로운 개념의 OS를 만드는 등 애플의 혁신과 성공을 이끌었다. 신개념 음악감상 서비스 '아이팟', 휴대폰을 ‘손안의 PC’로 스마트하게 변화시킨 '아이폰',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나 컴퓨팅을 즐길 수 있게 만든 태블릿PC '아이패드' 등 세계를 뒤집어 놓고 IT 업계를 혁신으로 이끄는 제품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애플을 이 시대 세계 최대 기업으로 우뚝 세웠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 8월24일 애플 CEO에서 물러난 지 40여일만에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