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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과학 /탐구

페이스북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 ‘해커 정신’을 앞세우다!








페이스북에 개설된 자신의 페이지(www.facebokk.com/zuck)에 마크 저커버그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나는 세계를 좀 더 열린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2010년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으며 작년에는 채식주의자가 됐다는 고백도 있다. 저커버그는 지난 8년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페이스북 성공 신화의 중심인물이다.

최근 기업공개(IPO)를 위해 제출한 문서에서 페이스북이 사실상 ‘저커버그의 왕국’이란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저커버그는 지분 28.4%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그 뒤를 이어 2005년 페이스북에 투자한 엑셀파트너스의 제임스 브레이어가 11.4%의 지분을 가졌으며 기숙사 룸메이트로 2004년 페이스북을 공동 창업한 더스틴 모스코비츠가 7.6%를 보유하고 있다.




주식 상장이 예정대로 마무리되면 페이스북의 기업 가치는 1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저커버그는 지분 평가액(284억 달러)만으로 단숨에 세계 부자 순위 9위에 올라선다. 정보기술(IT) 분야만 보면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590억 달러)와 오라클 창업자 랠리 엘리슨(330억 달러)의 뒤를 잇는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사용자가 좋아하는 음악을 분석한 다음 좋아할 만한 다른 음악을 추천해 주는 ‘시냅스’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마이크로소프트 등 여러 회사의 관심을 끌었다. 하버드대에 입학한 후 컴퓨터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는 엄청난 시간을 컴퓨터 프로그램 코딩에 쏟아부었다. 잠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기숙사 거실 컴퓨터 화면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여러 개발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벌이던 저커버그는 어느 날 가입자를 초청해 각자 취미와 음악 취향, 개인 정보 등의 ‘프로필’을 작성해 친구들과 연결하면서 자신의 인맥을 만들 수 있는 ‘더페이스북’ 서비스를 만들어 냈다. 그를 유명 인사로 만든 ‘페이스매시’, 당시 한창 뜨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프렌드스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쉽게 말해 하버드대생을 위한 온라인 인명록에 가까웠다. 하버드생들은 온라인 버전의 학생 편람을 갖고 싶어 했다.

저커버그에게는 여러 개발 프로젝트 중 하나였지만 새로운 서비스에 쏟아지는 학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이트를 연 지 1주일 만에 하버드대 학부생 절반 이상이 더페이스북에 가입했다. 회원이 되려면 하버드대 e메일을 갖고 있어만 했다. 3주가 지나자 가입자 수가 6000명을 기록했고 한 달 만에 1만 명을 돌파했다.

저커버그의 기숙사 친구 3명이 공동 창업자로 참여해 회사가 정식으로 설립됐다. 더스틴 모스코비츠는 경제학과 학생으로 나중에 페이스북의 첫 최고기술책임자(CTO)로 활약한다. 크리스 휴즈는 은발의 잘생긴 동성애자로 문학과 역사를 전공하고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브라질 재벌가 출신인 에두아르도 세브린은 체스를 잘 두는 수학 천재였다.

페이스북의 인기는 하버드대를 넘어 순식간에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컬럼비아대·스탠퍼드대·예일대가 서비스에 추가됐다. 4명의 하버드생들은 여전히 학업에 대한 부담을 지면서도 몇 주 만에 매사추세츠공과대(MIT)·펜실베이니아대·프린스턴대·브라운대·보스턴대에도 진출했다. 페이스북은 대학 문화에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2004년 가을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이 신입생 환영사에서 페이스북에 있는 신입생 대부분의 프로필을 살펴봐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인사말을 할 정도가 됐다.

사실 페이스북은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다. SNS는 다양한 기업과 개발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진화해 왔다. 공개 프로필 작성, 친구 목록 공개, e메일을 통한 초대장 등 핵심 기능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2002년께 마침내 소셜 네트워크가 실리콘밸리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학을 타깃으로 한 경쟁 서비스도 이미 하나둘이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2003년 8월 창업한 마이스페이스였다. 2004년 말 아이스페이스 회원 수가 500만 명을 돌파하자 저커버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페이스북이 마이스페이스보다 더 나은 대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았지만 차이점도 적지 않았다. 마이스페이스는 회원의 실제 아이덴티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원하면 얼마든지 가공의 인물로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 페이스북은 대학 e메일 계정으로 신원 인증을 했고 누구나 자신의 신분을 정확하게 밝혀야 했다. 마이스페이스는 모든 프로필이 공개됐지만 페이스북은 공개 범위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었다. 마이스페이스는 2005년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프에 인수된 후 잊혀졌다.

회사가 커지면서 페이스북은 동부를 떠나 서부 실리콘밸리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페이스북은 개성 있는 벤처기업이 즐비한 실리콘밸리에서도 도드라졌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만화처럼 멋지고 쿨한’ 회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페이스북에는 낮 12시 전에 출근하는 직원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느지막이 출근해 저녁이 돼야 일에 속도가 붙었다. 중요한 결정은 밤사이 메신저를 통해 이뤄졌다.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데이비드 최에게 사무실 벽화를 부탁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데이비드 최는 이때 비용을 돈 대신 주식으로 받아 이후 백만장자가 됐다.

2006년 위기가 찾아왔다. 대학에 이어 고등학교 대상 서비스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저커버그는 다음 타깃으로 ‘직장’을 꼽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했던 대로 직장 내 회사원을 대상으로 직장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2006년 5월 직장 네트워크가 문을 열었지만 반응이 시큰둥했다. 갑자기 회의론이 고개를 들었다. 페이스북이 학생들에게는 인기가 있지만 성인들은 그런 서비스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페이스북을 지탱하고 있는 저커버그의 ‘이론’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스티브 잡스'기 디자인과 기획에 중점을 전공분야였다면, '마크 저버그'은 프로그래머 정신으로 직접 만들고 고처나갔다.